양명학은 심즉리(心卽理)라 한다. 심즉리로부터 출발하여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에 도달하고 마지막으로 치양지설(致良知說)에 의하여 완성된다. 즉, 천리(天理)는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마음에 있으며, 사람마다 양지(良知;선악을 깨닫는 마음)를 타고났으므로 따로 학문할 필요 없이 이
양명학이 우리나라에서 전해진 것은 1521년이 된다. 이해는 왕수인이 50세로 강서(江西)에 있었는데, 양명연보(陽明年譜)에 의하면 "이해에 선생이 비로소 치양지의 교(敎)를 내어 걸었다"고 했다. 왕수인은 그해에 진구천(陳九川)에게 "양지 두 글자는 참으로 천고성현(千古聖賢)이 서로 전수한 한 점의
정신은 송대의 이정을 거쳐 주자에게 계승되어 성리학을 통하여 철학적으로 더욱 심화되고 이론화 되었다. 벽이단사상은 곧 유학(성리학) 이외의 이단과 사설을 배척함으로써 정통 유학의 순수성과 정통성을 보존하려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외적으로 이단에 대립하는 자세를 갖추는 것은 물론
만물(萬物)을 일체(一體) 로 하는 신성(神聖)한 것으로 파악하여 적자지심(赤子之心)에서 그 원형(原型)을 설명하는 수기지학(修己之學)으로서의 유학(儒學)은 적자지심(赤子之心: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갓난아이의 마음처럼 거짓이 없는 순진무구한 마음 또는 임금에게 일편단심으로 충성을 다하는 백
제1강 일연의 三國遺事
1. 일연 (1206~1289) 경상북도 경산 출생, 고려승려
2. 삼국유사의 의미: 고대인의 삶과 문화에 대한 풍부한 내용으로 우리 민족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으며,
이전의 책들에서 빠지거나 자세히 드러나지 않은 사실을 담고 있음
3. 삼국유사의 저술동기: 몽골의 침입이후 우리 민족
1. 왕양명의 생애
왕양명은 이름은 수인(守仁), 자(字)는 백안(伯安), 양명은 그의 호(號)이다. 성화(成化) 8년(1472) 9월 10일에 절강성 여요(余姚)에서 태어나, 가정(嘉靖) 7년(1528) 이향(異鄕)에서 객사하였다. 향년 57세의 나이였다. {연보}에 의하면, 그의 조상은 진(晋)의 광록대부(光祿大夫) 왕람(王覽)으
설을 지향하고 있다. 무시선 무처선, 처처불상 사사불공, 영육쌍전 이사병행 동정일여 등의 표어는 원불교 교리사상의 실천적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소태산은 1920년 그의 원불교 창건 5년 4월에 교리의 최초문서인 인생의 요도 사은 사요와 공부의 요도 삼강령 팔조목을 발표 하였다. 인생
1) 민중불교의 대명사, 백련교와 백운교
5대 10국 이후에는 불교가 몰락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불교가 민중과 가장 긴밀하게 밀착되었던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선불교는 번쇄하고 비현실적인 논리에 문제를 제기하고 출발하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자신 역시 비현실적이고 관념적
퇴계선생은 높은 벼슬자리는 마다하고 낮으면서도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할 수 있는 외직을 주로 원했다. 원래 이황은 원래 높은 자리에 올라 이름을 날리는 것을 꺼려했으며 그의 형이 간신들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자 재야로 물러가 숨을 굳혔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황이 살다 간 16세기
양명학에서는 이미 마음에 양지가 있으므로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며, 치양지설을 주장하였다. 셋째 성리학에서는 먼저 알고 이어서 행하여야 한다고 하였는데, 양명학은 알고서 행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면서 알고서 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앎이 아니라고 하며 지행합일설을 주장하였다. 이렇듯 주자학